모든 만남에는 때가 있고, 그 때가 다하면 흩어집니다.
모든 인연을 끝까지 붙들지 않아도 됩니다. 시절이 다해 멀어지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단지 우리에게 허락된 계절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50년을 넘게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때'가 있습니다. 젊을 때는 좋은 사람은 오래 곁에 남아야 하고, 오래 알았던 사이는 쉽게 끊어지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때는 매일같이 연락하던 친구, 힘든 시절을 함께 버텨 준 동료, 가족보다 더 자주 속마음을 나누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뜸해지고 만나는 횟수가 줄면서 서로의 안부가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듭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 사람이 변한 건가,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해야 하나. 50대가 되고 나서도 사람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젊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인간관계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알게 됩니다. 같은 부서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며 밥도 같이 먹고 회사 욕도 같이 하며,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 알던 사람이 인사이동 한 번으로 멀어집니다. 그때는 그렇게 끈끈했던 사이가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면 생각보다 쉽게 느슨해집니다. 퇴직한 선배와도 처음 몇 번은 연락을 주고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생활이 달라져 자연스럽게 뜸해집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배신처럼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요.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절이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불교에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만남에는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고, 그 때가 다하면 인연도 자연스럽게 흩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이 말이 조금 쓸쓸하게 들렸습니다.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모든 관계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멀어진다고 해서 그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함께했던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시절에 서로에게 진심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연이었던 것입니다.
50대가 되면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조금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누가 나를 찾지 않으면 서운했고,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끊어질 관계라면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혼자 애쓰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쪽만 붙잡는 인연은 결국 지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인연은 이상하게도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남습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고, 오랜만에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으며 서로의 사정을 이해해 줍니다. 반대로 아무리 오래 알고 지냈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매번 나만 맞추고 있다면, 그 관계는 이미 시절이 다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멀어지는 인연을 아무렇지 않게 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오래된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10년, 20년을 알고 지낸 사이가 어느 날부터 남처럼 느껴지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입니다. 함께 웃었던 기억, 어려울 때 주고받았던 대화, 사소한 약속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지금의 나를 계속 아프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잠시 머물렀기에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인연이 하찮았던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속도로 살아갑니다. 젊을 때는 비슷한 고민을 하며 함께 걷던 사람들이 중년이 되면 각자의 가족, 건강, 일, 부모님 문제, 자식 걱정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있어도 예전처럼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만나도 예전 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변화를 서운함으로만 받아들이면 내 마음만 다칩니다. 인연도 계절처럼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조금은 편해집니다.
봄에 피는 꽃이 가을까지 그대로 남아 있지 않듯, 어떤 인연은 그 시절에만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그때는 참 예뻤고, 참 고마웠고, 참 소중했습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꽃이 졌다고 해서 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연이 멀어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아무 의미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서로의 계절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착이 아니라 감사인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잘하면 되고, 떠나간 사람에게는 마음속으로 고마웠다고 말하면 됩니다. 굳이 이유를 캐묻지 않아도 됩니다. 연락 없는 사람에게 계속 답을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붙잡는다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조용히 놓아주는 것이 그 관계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 때가 있습니다.
시절인연이란 결국 이런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올 사람은 오고, 머물 사람은 머물며, 떠날 사람은 떠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사람을 배우고, 마음을 배우고, 나 자신을 배운다는 것. 떠나간 인연 때문에 오래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했던 시절에 내가 진심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사람도 그 시절의 나에게는 분명 필요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 사람의 어떤 시절에는 의미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떠나는 인연을 너무 붙잡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려 합니다. 인연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임을, 50대를 지나며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삶에 머물다 간 모든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오래 남지 않았어도 그 시절은 분명 진짜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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