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를 읽고, 남은 삶을 생각하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지금, 은퇴를 앞두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본다.
오래전에 읽었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펼쳐 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인류가 어떻게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는지,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과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가 흥미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책의 내용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가 달라진 모양이다.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종과 달리 국가, 종교, 화폐, 기업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믿고 협력하는 능력을 통해 거대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평생 몸담아 온 직장도 그런 질서의 일부다.
우리는 회사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처럼 여기고, 성과를 내고, 평가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20년, 30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사에서의 역할이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은퇴가 가까워지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직책이나 성과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까. 물론 그 시간들이 헛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사피엔스』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농업혁명에 대한 해석이다. 인간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개개인의 삶이 반드시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노동과 새로운 의무를 떠안기도 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기술은 발전하고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시간에 쫓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면서 정작 그 삶을 누릴 여유는 부족하다.
이제는 AI가 세상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AI는 글을 쓰고, 자료를 분석하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오랜 경험과 전문지식이 필요했던 일들도 짧은 시간에 처리한다. 평생 한 분야에서 일해 온 사람에게는 조금 허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나온 경험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하면서 배운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실패를 겪으며 얻은 판단력, 사람들과 부딪히며 배운 관계의 어려움, 문제를 해결해 온 경험도 남아 있다.
다만 과거의 경험만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방식이 편해지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면 우리도 조금씩 배워야 한다. AI를 공부하는 것도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라기보다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은퇴를 준비하는 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준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남은 삶이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할 것인지, 누구와 시간을 보낼 것인지,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회사 밖의 나를 조금씩 만들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특별한 성과가 없어도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갖는 것이다.
하라리는 인간이 끊임없이 힘을 키워 왔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인류 전체를 향한 질문처럼 느껴졌던 이 말이, 지금은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득,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을 더 이룰 것인가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갑자기 삶을 바꾸거나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하는 일을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것을 조금씩 배우고, 건강을 돌보며, 가까운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남과 비교하는 일을 조금 줄이는 것.
오래전에 읽었던 『사피엔스』가 그때는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책이었다면, 지금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 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사회와 조직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 맞춰 살아왔다. 이제는 조금씩 나 자신의 시간표를 만들어 갈 때가 아닌가 싶다.
남은 삶까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되 조급해하지 않고,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너무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것.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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